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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江邊에 살리라 /- 默想

야고보서 2장

키워드 :  믿음, 차별, 긍휼, 형제, 행함

1. 사도는 1장에서 성도들에게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라고 권면하면서 참된 지혜는 행하는 믿음이라고 피력하였다.

2장에서 사도는 이어서 행하는 믿음이 어떻게 지혜로운 것인가를 교회 생활을 들어서 설명한다.  즉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는 최고의 율법의 말씀을 믿음으로 지키는 것이 얼마나 지혜로운 일인 것인가 하는 것과,  그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가난한 형제를 차별하는 것은 우선은 악한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셔서 믿음을 주시고 또한 그 믿음에 부요케 하사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게 하셨기 때문이다. 상속이라는 용어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예컨대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그 자녀들이 부모님의 자손을 상속받는 것처럼, 부모 자식 사이의 관계를 전제로 사용하는 단어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그 가난한 자들에게 상속하게 하신 것은 천지의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 가난한 자를 선택하시고 구원하시어 아버지가 되셨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율법에 그리 적혀 있으니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그 성호와 그 베푸신 은혜와 관련이 되어 있다. 왜냐하면 가난한 형제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예수님께서 그 형제를 위해서 피를 흘리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형제 사랑의 근본이요 실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바로 그 뒤에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가난한 자를 차별하는 것을 그 당시의 신자들이 쉽게 겪을 수 있었던 부자가 신자를 억압하는 사실을 들어 설명한다. 여기서 사용한 단어인 "억압"이라는 용어는 사도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 사탄의 압제적인 사역을 가리키는 데 사용하였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신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억압된)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사도행전 10:38)" 이처럼 강한 용어를 사도는 사용한 것인데, 이는 형제를 차별하는 것은 사탄의 역사이며, 그 본질은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부자가 신자를 억압하는 것이 마귀의 소행인데, 너희가 가난한 형제를 차별하는 것이 이와 다를 것이 무엇이냐? 이는 하나님이 내려 주신 이름을 비방하는 것이 아니냐? 하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다음에 사도는 더욱 분명하게 형제를 차별하는 것이 죄라고 선명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형제를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 한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그리고 형제 사랑의 기본을 가르쳐 준다. 그것은 형제에 대하여 긍휼을 행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먼저 긍휼을 보여주셨기 때문이기도 하다.

요약하면 형제에 대한 행함의 믿음의 표현은 형제에 대해 긍휼을 나타내는 것이다.

2. 이어서 사도는 이 명제를 구체적인 사실을 들어서 설명한다.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우리 주변의 가난한 형제가 굶주리고 헐벗었을 때에 그 형제에 긍휼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나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며 이 죽은 믿음은 신자에게 유익이 없다고 확언한다. 왜냐하면 믿음은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행함으로 네 믿음을 보이라고 한다. 믿는 바 마음의 확신은 행함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인데, 드러나지 아니함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사도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의 고사를 들어서 그들이 어떻게 행함으로 믿음을 보였는지를 설명한다. 즉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께서 제물로 이삭을 드리라고 하셨을 때에,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순종하여 제물로 바침으로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받으시고 의롭다 하신 것이다. 이 믿음은 아브라함의 순종으로 인하여 온전케 된 것이다. 기생 라합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스라엘의 사자들을 대하여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다.

이로써 사도는 결론을 내린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2020.01.11 아침 08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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