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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江邊에 살리라 /- 讀書信仰

구속사적 설교와 모범적 설교

구속사적 설교의 의미와 한계


<그 말씀> 98년 11월호에 실린 글의 오리지널 원고

                     변   종   길 교수(고신대학원) 

 

I. 들어가는 말

  구속사적 설교와 모범적 설교에 대한 논쟁은 1940년대 초 화란개혁교회 안에서 홀베르다(B. Holwerda)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는 1940년부터 성경의 '역사적 부분'을 어떻게 설교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강연을 하고 글을 써 오다가, 1942년에 화란 개혁교회 목사들의 모임에서 이 주제에 대해 강연한 것이 나중에 '설교에 있어서의 구속사'이라는 제목의 글로 출판되었다("De Heilshistorie in de prediking", in B. Holwerda, "… Begonnen hebbende van Mozes …", Kampen, 1953, 21974, pp. 79-118). 그 후로 화란개혁교회 안에서 '구속사적 설교'와 '모범적 설교'라는 용어가 일반화되었다. 

 

  그 후 1970년에 캐나다의 시드니 흐레이다너스(Sidney Greidanus)가 화란 자유대학에서 이 주제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Sola Scriptura. Problems and Principles in Preaching Historical Texts, Kampen, 1970). 우리 나라에 구속사적 설교 논쟁이 소개된 것은 주로 영어로 쓰여진 이 시드니 흐레이다너스의 논문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이 논문은 많은 생략들과 정확하지 않은 시사들과 잘못된 해석들로 인해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C. Trimp의 아래 책 서문).

 

  그러다가 이 논쟁에 다시금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1986년에 출판된 트림프(C. Trimp) 교수의 '구속사와 설교'라는 책이다(Heilsgeschiedenis en prediking, Kampen, 1986). 그는 이 책에서 구속사적 설교에 대한 논쟁을 다시 끄집어내어서 이 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그는 구속사적 설교에 대한 논쟁을 소개하고 분석한 후 구속사적 설교 주장자들이 잘못 이해하거나 놓치고 있었던 것들을 지적하면서 좀더 균형 잡힌 이해를 위한 방향을 제시하였다. 즉, 그는 성경에서 '모범'(exemplum)에 관한 용어들을 분석하면서 '모범적 적용'의 길을 넓혀 주고 있으며 '구약에서의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였다. 이런 점에서 트림프 교수의 견해는 기존의 '구속사적 설교'의 장점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벗어나려고 하는 조심스런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에서는 이 책이 마치 '구속사적 설교'를 옹호하고 대변하는 책인 것처럼 소개되고 있는 것은 유감스런 일이다.

 

II. 구속사적 설교와 모범적 설교

 

  그렇다면 홀베르다가 주장한 '구속사적 설교'란 무엇이며 그가 반대한 '모범적 설교'란 어떤 것인가? 오늘날 이에 대해 많은 오해가 있기 때문에 직접 그의 설명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는 '모범적 설교'를 '성경 역사를 우리를 위한 모범이 되는 여러 독립적인 역사들로 분해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이에 반해 '구속사적(또는 기독론적) 설교'란 '이 모든 기사들을 상호관계 속에서, 그들 상호간의 내적 단일성 가운데서, 곧 구속사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련 속에서 이해하는 것'으로 보았다(Holwerda, p. 82).


  그리고 나서 홀베르다는 이와 관련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모범적 설교 방법 추종자들은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지 않는 것처럼"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또한 마찬가지로 "역사적 본문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은 이것들이 우리를 위한 모범들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왜 이것들이 모범들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려고 한다."(p. 82). 이러한 홀베르다의 설명에 의하면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개념이 잘못된 것처럼 보인다. 둘 다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있으며 둘 다 오늘날 우리를 위한 적용을 인정하고 있다면, 무엇 때문에 하나를 '모범적 설교'라고 부르고 다른 하나를 '구속사적 설교'라고 부르면서 서로 열띤 논쟁을 벌였단 말인가? 이 둘 사이에 무슨 중요한 차이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홀베르다는 그래도 이 두 방법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 핵심적인 차이는 "우리가 많은 독립적인 역사들을 다루느냐 아니면 하나의 역사를 다루느냐"의 문제라고 한다(p. 82). 여기서 '구속사'라는 개념으로써 홀베르다는 성경 역사의 '단일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는 곧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을 의미하고 있다(p. 83f.). 물론 그는 '그리스도 중심적'이라는 용어로서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인격'에 연결시키는 것을 반대하며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폭넓게 적용하고 있다. 어쨌든 홀베르다는 성경의 개개 역사를 독립적인 별개의 사건들로 보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와 관련된 사건으로 보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그 당시 화란개혁교회의 다우마(J. Douma) 목사는 이러한 홀베르다의 견해를 반대하면서, '모범적'이란 용어를 '경건의 실천을 지향한'(op de practijk der godzaligheid gericht)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는 역사적 본문들을 우리의 유익을 위해 일반적으로 적용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p. 85).


  여기서 우리는 '구속사적 설교' 주장자들과 '모범적 설교' 주장자들 사이에 용어 이해상에 중요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모범적'이란 말을 홀베르다는 '성경의 역사를 각각의 독립적인 역사들로 분해하는'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지만, 다우마는 이와는 다르게 '우리의 실생활에 적용되는'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상 '구속사적 설교'와 '모범적 설교' 사이의 논쟁의 대부분은 이러한 용어 이해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왜냐하면 '구속사적 설교'를 주장하는 홀베르다도 성경의 적용성을 인정하고 있으며, 다우마도 성경의 역사를 각각의 독립된 역사로 보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와 관련된 것으로 보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기 때문이다(p. 85).


  그렇다면 이 두 주장들 사이에 차이가 전혀 없는 것일까? 아니다. 그래도 무시 못할 차이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 두 방법 사이의 진정한 차이는 무엇일까? 필자의 견해로는 '구속사적 설교' 방법에서는 어떤 특정한 성경 역사에서 오늘날 우리를 위한 교훈을 이끌어내는 것을 반대하는 반면, '모범적 설교' 방법에서는 구속사적 맥락을 인정하는 동시에 또한 오늘날 우리를 위한 교훈을 이끌어내는 데 좀더 적극적이라는 점에 사실상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자주 논란되는 '아브람의 거짓말' 본문(창 12:10-20)을 생각해 보자. 구속사적 설교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본문에서 '거짓말'에 대한 교훈을 이끌어내는 것을 반대하고 오로지 구속사적 맥락에서 이해할 것을 주장한다. 곧 하나님께서는 이 본문을 통해 자신을 전능하신 분으로 보여 주시며, 또한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으로 보여 주신다는 것이다(고재수, [구속사적 설교의 실제], 기독교문서선교회, 1987, pp. 16-22). 이에 비해 '모범적 설교' 방법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본문의 핵심은 물론 하나님의 약속과 그 성취임을 인정하지만, 이와 동시에 또한 오늘날 우리의 삶에 대한 교훈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III. 고린도전서 10장(모범과 경계)

 

  그렇다면 이 두 설교 방법 중 어느 것이 성경적으로 옳은 것인가? 특히 신약 성경에 비추어 보아 어느 것이 더 타당한 것일까? 물론 이 문제에 대해 쉽게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모범'이라는 용어에 대해 신약 성경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필요하다.


  트림프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홀베르다는 '모범'(exemplum)이라는 개념을 "충분하지 못하게 기술했으며, 정확하지 못하게 규정했으며, 따라서 잘못 다루었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Trimp, p. 74). 홀베르다는 '모범적' 설교란 말을 '하나의 구속사가 많은 독립적인 역사들로 분해되는 설교 방법'이라고 정의하였지만, 이러한 정의는 순수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법에 의해 '모범적 설교'는 사실상 사전에 잘못된 방법이라는 개념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p. 75). '모범'이란 말은 라틴어 '엑셈플룸'(exemplum)이란 단어에서 왔는데, 이 단어는 원래 '…에서 취하다'(ex-imo)라는 동사에서 온 단어이다. 그래서 '모범'은 원래 '많은 것들 중에서 취한 것'으로서 전체의 상태를 알기 위한 '표본'(sample)을 뜻한다. 따라서 이것은 홀베르다가 생각한 것처럼(Holwerda, p. 85) 우리를 전체로부터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로 하여금 전체를 알게 해 주는 역할을 한다(Trimp, p. 75). 이런 점에서 홀베르다가 '모범'을 역사적 성격을 결(缺)하는 것으로 본 것은 잘못이다. '모범'은 역사들 중의 하나로서, 역사 속에 있으면서 우리에게 '경고하는 모범'이 되기도 하고, 우리로 하여금 '본받도록 하는 모범'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모범'(exemplum)의 용례를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역사는 모범적(exemplarisch)이다."라고 충분히 말할 수 있다고 트림프 교수는 주장한다(p. 75f.).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바도 이와 같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멸망 받은 사실을 가리켜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tupoi)이 되었다고 말한다(6절). 여기서 '거울'은 원어로 '튀포이'(tupos의 복수)인데, 우리말 성경에는 '본'(本) 또는 '표상'(表象) 등으로 번역되었다(딤전 4:12, 딛 2:7, 롬 5:14, 요 20:25, 행 7:43, 행 23:25). 이것은 이전에 일어난 어떤 사건이 후에 일어날 사건 또는 행동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을 말한다.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받은 벌들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의미를 가지는 '경계'가 되고 '교훈'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런 일은 …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다(6절). 그리고 나서 바울은 우리에게 저희들과 같이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며, 간음하지 말며, 주를 시험하지 말며, 원망하지 말라고 교훈하고 있다(7-10절). 이것은 곧 사도 바울이 구약의 역사적 사건에서 오늘날 우리를 위한 교훈을 자유롭게 끌어내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나서 11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이 구절은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런 일들은 저희들에게 모범적(예표적)으로 일어났으며, 우리의 경계를 위해 기록되었느니라. …" 곧 이런 사건들은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모범적으로/예표적으로'(tupik s) 일어났으며,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 '경계'(nouthesia)가 되도록 하기 위해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말하고 있다(12절). 이처럼 사도 바울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은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의미가 있으며 계속적으로 경계가 된다는 관점에서 구약의 역사적 사건을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거울'과 '경계'가 되는 사건은 구약에 나오는 몇몇 특별한 사건들에 국한되는 것일까 아니면 구약의 모든 사건들에 다 해당되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은 고린도전서 10장 초반에서 '출애굽 사건'과 '반석에서 물을 마신 사건'을 예표적으로 설명한 다음에 나온다는 이유로 구약의 몇몇 특별한 예표적 사건들로 국한시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홀베르다와 그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 그러나 문맥을 살펴보면 이것은 옳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5절 이하에서 우리의 '거울'이 되고 '경계'가 되는 사건들은 어떤 특정한 사건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우상 숭배'와 '간음'과 '주를 시험하는 것'과 '원망'하는 것 등이다. 그래서 6절에서는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악을 즐겨하다'는 말은 원어로 '욕심을 내다, 탐심을 부리다'(epithume )라는 뜻으로서 일반적인 악행 또는 악행의 소욕을 가리킨다(롬 1:24, 갈 5:16, 엡 4:22 등). 그리고 12절 이하에서 바울은 7-10절의 역사적 사건에서 우리에게 일반적인 교훈을 끌어내고 있다. 곧 우리가 어떠한 시험을 당할 때에라도 피할 길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13절). 

 

IV. 로마서 15장(우리의 교훈)

 

  이러한 것은 로마서 15장 4절에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여기에 보면 '전에 기록한 어떤 것'이라고 되어 있지 않고 '전에 기록한 모든 것'이라고 하였다. 곧 구약 성경에 기록된 것들 중에서 어떤 특별한 사건들만 신약 시대 성도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아니하고, '전에 기록한 모든 것'이 오늘날 우리를 위해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우리의 교훈을 위해' 기록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의'(h meteran)는 강세형인 소유형용사이다. 즉, 전에 기록된 것이 '오늘날 우리'를 위한 것임이 더욱 강조되어 있다(cf. 박윤선, [성경주석 로마서], p. 386). 여기서 '교훈'이란 넓은 의미의 가르침을 뜻한다. 그 구체적 내용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의 인내와 안위로 인하여 소망을 가지게 하려 함"이다(직역). 따라서 구약에 기록된 것은(역사적 본문을 포함해서) 단순히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의미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를 위한 의미를 가진다고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구약의 역사적 사건들은 단지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석하고 끝날 것이 아니라, 오늘날 성도의 삶에 관련된 것으로 폭넓게 이해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이 점에 있어서 구약의 역사적 사건들을 '구속사적으로만' 해석하려는 시도는, 비록 그 의도가 선한 것이라 할지라도, 성경의 폭넓은 적용을 제한하고 있으며 신약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구약에 기록된 모든 것이 오늘날 '우리의 교훈'을 위한 것이라고 해서, 구약의 역사를 따로 떼어 내어서 오늘날 성도의 삶에 아무렇게나 무분별하게 적용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를 들어 구약 시대의 아브라함이 고향 친척집을 떠났다고 해서 오늘날 우리도 고향을 떠나야 한다든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발로 밟는 땅을 다 그와 그 후손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셨다고 해서 오늘날 우리가 발로 밟는 땅이 다 우리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큰 오해요 잘못인 것이다. 이처럼 성경 전체의 흐름과 사상을 무시한 채로 무분별하게 오늘날 성도의 삶에 적용한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잘못된 '모범적' 해석이요 설교가 되고 만다. 이러한 것은 성경의 전체 사상에 맞지 않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건전한 상식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잘못된 '모범적' 적용이 수많은 올바른 '모범적' 적용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위에 예를 든 것과 같은 일부 잘못된 무분별한 '적용'(사실 이런 것은 '적용'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왜냐하면 '적용'이란 올바른 근거 위에 행해지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성경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고 있는 '교훈'과 '경계'와 '거울'을 무시하고 협소하게 '그리스도 중심적'으로만 보려 한다면, 무분별한 적용자들이 범한 것과 마찬가지의 잘못을 범하는 것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오늘날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말기 때문이다.

 

V. 히브리서와 야고보서

 

  이상에서 살펴본 고린도전서 10장과 로마서 15장 외에도 신약 성경은 구약의 사건이나 인물들에게서 오늘날 우리를 위한 폭넓은 교훈을 끌어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 11장에서는 구약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의 삶을 길게 소개하면서, 오늘날 성도들을 위한 교훈을 끌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홀베르다는 이 본문에 대해 '믿음으로'라는 '교리'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증거 구절들을 자유롭게 택할 수 있다고 설명하지만(p. 95), 별로 설득력 있게 들리지는 않는다. 히브리서 기자는 단지 어떤 '교리'를 증명하기 위해 증거 구절들을 나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약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의 삶에서 오늘날 우리 성도들을 위한 교훈을 찾고 있는 것이다. 12장 1절에 보면 히브리서 기자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여기에 보면 히브리서 기자는 크게 두 가지 교훈을 끌어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첫째는 우리의 '믿음의 삶'과 관련된 것으로 죄를 벗어버릴 것과 인내로써 경주할 것이다. 둘째는 우리의 '믿음의 주'인 예수를 바라보자는 것이다. 이처럼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 성경에서 오늘날 성도들의 신앙과 생활에 관한 유익한 교훈을 끌어내면서 성도들을 격려하고 있다,


  야고보서도 마찬가지로 말하고 있다. 야고보는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고 말한다(5:10). 여기서 '본'(hupodeigma)이란 말은 '예, 모범'이란 뜻으로 우리가 본받을 만한 행동이나 삶을 가리킨다. 그 예로서 야고보는 '욥의 인내'를 들고 있다(5:11). 우리가 욥의 모든 삶을 다 흉내내자는 것이 아니라(사실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다), 그의 인내를 본받아서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주실 복을 바라보면서 끝까지 믿음으로 인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야고보는 '믿음의 기도'에 대해 말할 때에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고 말하면서 엘리야를 예를 들고 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性情)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3년 6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5:17,18) 많은 사람들은 이 본문에 대해 "우리는 엘리야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엘리야처럼 비가 오지 않도록 그렇게 기도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Holwerda, p. 84). 물론 우리가 엘리야를 그대로 모방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시대 상황이 다르고 여건이 다르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야고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엘리야는 우리와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와 본질적으로 동일한'(homoiopath s h min) 사람이라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오늘날 우리도 경건하게 살면서 믿음으로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큰 역사를 행하신다는 의미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될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상황에서 본문을 해석하려고 하고 있으며, 자기가 할 수 없다고 해서 분명한 본문을 다르게 해석해 버리는 잘못을 자주 범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직하지 못한 태도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이다.

 

VI. 모방과 모범

 

  물론 우리가 기도할 때에 엘리야가 간구했던 것처럼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도록 기도해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서 과거의 역사를 그대로 '모방'하려는 것으로 잘못된 태도이다. 야고보가 우리에게 그런 모방을 말하고자 하지 않았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해서 말할 필요도 없다. 야고보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한 것은 이처럼 하나님을 믿고 간구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큰 역사를 행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의 사건을 그대로 '모방'(imitating)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그것을 '모범'(example)으로 삼아 오늘날에 적용하는 것은 옳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카톨릭 교회의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그대로 '모방'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수난일에는 십자가를 지고 가서 나무에 매달리는 것을 재현(再現)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재현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런 식으로 고난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지도 않으시며,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도 아무런 유익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개신교의 자유주의 신학자들 중에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모범적으로 보고 그의 자기 부인과 희생의 윤리를 그대로 모방하려는 경향이 많다. 그러다 보니 그리스도의 유일한 속죄 사역이 무시되거나 부인되기 때문에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이러한 '모범적' 해석을 강하게 반대하게 되었다. 그 결과 개혁주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삶에 대해 '모범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 강한 알레르기적 반응을 보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잘못된 신학에 대한 반작용에서 나온 것이며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옳은 것이 아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유일한 의미를 확실히 말하는 동시에(롬 5:6-8, 고후 5:14, 갈 3:13 등), 또한 그의 고난에 참여할 것을 말하고 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말하고 있다(벧전 2:21). 여기서 '본'(hupogrammos)은 '모범'이란 말과 같은 뜻으로서, '모방'은 아니지만 우리가 따라야 할 '모형' 또는 '귀감'을 말한다. 이는 곧 의를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며, 욕을 받되 대신 욕하지 않는 것이며, 고난을 받되 위협하지 아니하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는 것을 말한다(19-23절).


  또한 사도 바울은 그가 전도하고 가르친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자주 말하고 있다(고전 4:16, 11:1, 빌 3:17, 살전 1:6 등). 나아가서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주목하라."(빌 3:17; cf. 살전 2:14, 벧전 5:3)고 말한다. 이런 것들을 볼 때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에서 무분별하게 '모방하는 것'은 금지되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합당하게 '본받는 것'은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저 '말씀'으로만 가르치지 아니하시고 또한 '행함'으로 보여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30여년을 인생 가운데 함께 사신 것도 '말씀'으로뿐만 아니라 '행함'과 '삶'으로써 모범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다. 사도 바울도 그저 '말'과 '교리'로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였으며(고전 2:4, 살전 1:5), 또한 그들에게 '본'을 주어 본받게 하였다(살후 3:9, 살전 1:6).

 

VII. 구속사적 설교의 장점과 문제점

 

  그렇다면 이제 '구속사적 설교'에 대해 종합적인 평가를 내려보도록 하자. 구속사적 설교란 성경 전체의 흐름을 강조하며 그 중심이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한 점에 있어서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이나 역사적 사건들을 타당한 근거도 없이 쉽사리 오늘날 우리를 위한 윤리적인 예화들로 보고 마는 것을 경계한 것은 큰 공로이다. 구속사적 설교 방법은 설교자에게 전체 구속사의 틀 안에서 본문의 위치와 의미를 살펴보도록 촉구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구속사적 설교 방법은 오늘날에도 우리가 어떤 역사적 본문을 대할 때 좀더 신중하게 접근하도록 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속사적 설교 방법은 근본적으로 몇 가지 중대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들이 반대하는 '모범' 개념이 모호하다는 것과 성경이 '모범'에 대해 가지는 입장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보았다. 그 외에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로, 구속사적 설교 방법은 구약 시대 성도들도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구약 시대 성도들도 신약 시대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동일한 하나님을 믿고서 살았다. 따라서 그들은 단지 그리스도를 바라만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가운데 '실제로' 살았다. 그들의 삶은 단지 오실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예표로서의 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먼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생생한 삶을 살았다. 따라서 그들에게도 때때로 확신과 의심, 범죄와 실패, 회개와 순종, 기도 응답과 기쁨, 변화와 성화의 과정 등 성도로서의 신앙 생활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들의 삶에는 오늘날 우리를 위한 교훈과 경계가 풍부하게 들어 있다. 구속사적 설교 주장자들은 구약 본문에서 '그리스도 중심적' 사상을 찾는 데는 기여하였지만, 성도의 삶에 대한 이처럼 풍부한 교훈을 찾는 데는 미흡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구속사적 설교 주장자들은 구약 성도들에게서 신약의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는 '수평적 노선'(horizontal line)은 잘 보았지만,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생생하게 살아가는 '수직적 노선'(vertical line)은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이다.


  둘째로, 따라서 이들은 구약에서의 그리스도와 성령의 역사를 간과하고 있다. 홀베르다는 구약에서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향한 노선만 보았지만, 하나님의 언약 구조 안에서 그리스도와 성령은 구약 시대에도 이미 역사하고 계셨던 것이다(Trimp, pp. 96-100). 구속사적 설교 주장자들이 이 점을 놓쳐 버린 것은 치명적인 결함이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로써 그들은 구약 시대에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의 풍부한 역사를 간과하는 잘못을 범하고 말았다. 구약 시대 성도들은 그저 앞으로 오실 메시야만 바라보고 한 평생을 보낸 것은 아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약속과 계명을 가지고 살았으며, 부패한 인간의 본성으로 말미암는 죄와 연약함의 문제를 안고 씨름했으며, 그들이 비록 분명하게 인식하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성령의 인도와 도와주심을 체험하고 기뻐했으며, 날마다 그들 안에 역사하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점점 더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화되어 갔던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귀한 교훈과 경계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단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씨'만 설교해서는 안 되며, 그가 가나안 땅에 살면서 겪었던 여러 인간적 어려움과 갈등, 실망과 좌절, 그 가운데서 다시금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 등에 대해서도 생생하게 설교할 수 있어야 한다.

 

VIII. 맺는 말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교훈을 찾을 때 그것이 성경 문맥에서 합당하게 나올 수 있는 교훈이어야 하며 성경 전체에 비춰 볼 때 하나님의 뜻에 맞는 적용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본문의 문맥과 성경 전체의 사상에 어긋나게 해석하고 적용한다면 그것이 잘못된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구속사적 설교'냐 '모범적 설교'냐 하는 구도 자체를 벗어 버려야 한다. 사실 '구속사적 설교'냐 '모범적 설교'냐 하는 것은 잘못 설정된 구도로서 많은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홀베르다의 후계자인 트림프 교수가 이런 문제점을 느끼고 상당히 의미 있는 방향 전환을 시도했으며, 그의 후계자인 드 라이터(C. J. de Ruijter) 교수가 다시금 '모범적 설교'를 좀더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필자의 견해로는 이러한 구도 자체를 벗어나는 것이 올바른 해결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단지 그 주어진 성경 본문과 성경 전체에 비춰 보아서 '올바른 설교'와 '올바르지 못한 설교'가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성경 본문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구속사적 의미를 찾아야 하며(억지로 찾으려고 할 필요는 없다), 또한 오늘날 우리를 위한 교훈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우리의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택한 본문의 의미를 최대한 원래 하나님의 의도에 맞게 잘 드러내고 오늘날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오늘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어야 한다. 한낱 지나간 '역사책'으로 읽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런 것을 반복해서 읽고 설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오늘날 우리가 계속 읽고 설교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오늘날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나침반'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나침반'일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 발의 등불'이며 '우리 길의 빛'이다(시 119:105). 구약 시대에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났었지만 그 가운데서 특정한 것들만이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가 그것을 읽을 때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표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는 이것이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요, 신약 시대에 사도들이 이해한 바요, 오늘날 우리가 읽고 설교해야 할 바라고 믿는다.  <끝>


1. http://torontosarangchurch.com/board4/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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