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할례의 표에 의하여 이중 은혜가 나타난 바 되었다는 점이 특별히 진술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축복받은 씨르 ㄹ약속해 주셨는데, 이 씨에게서 온 세상을 위한 구원이 기대되도록 되어 있었다. "내가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창17:7 는 약속은 이것에 달려 있었다.
4. 그러므로 값없는 하나님의 화목이 이 표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5. 이를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아직 나이가 어린 탓으로 할례하라는 명령을 수행할 수 없었던 어린 영아들의 할례를 하나님께서는 명하셨다. 모세는 영적 할례를 하나님의 능력의 사역으로 특별히 언급하였다. 이는 신명기 30장 6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주꼐서 네 마음을 할례하실 것이라"
6. 결론적으로, 오늘의 세례에 두 가지의 요소가 있듯이, 옛날의 할례에도 거듭남의 생활(newness of life) 와 죄 사함(forgiveness of sins)의 두 가지를 증거한 두 요소가 있었다.
7. 할례는 믿음의 의를 인치는 것으로서, 믿는 우리에게 의가 전가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이 바울은 놀라운 솜씨를 발휘하여 그의 적수드이 제사할 가능성이 있었던 반론에 응수하고 있다. 즉 만일 할례의 바로 그 진리와 의의가 무할례시에 발견되도록 되어 있는 것이라고 하면,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 대해 크게 자만할 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8. 할례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치는 데만 유효하다는 것이 인정되었을 경우, 오늘날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세례가 존재하는 경우, 이제는 할례란 아무 필요가 없는 깓락에, 이미 해결되어버린 문제 즉 왜 이방인에게는 믿음의 의가 아브라함의 경우와 똑같은 방식으로 인쳐질 필요가 없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아무 이득이 없는 논쟁을 바울은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9. 오직 믿음만이 모든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할례와 믿음을 조심스럽게 구별짓고 있는 것이다.
10.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이 세례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을 부인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브라함의 것과 똑같은 믿음에 의해서 의롭다 함을 받기 때문이다.
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 믿음이 의롭다 함을 얻는 데 아무것도 율법에서 빌려오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그 믿음은 하나님의 긍휼과만 관련되어 잇다는 것을 우리는 이로부터 알 수 있다.
2. 이로부터 결론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의 의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은혜는 유대인에게 못지 않게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진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만일 인간들의 구원이 하나님의 선하심에만 근거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방인들을 그 은혜에서 제외시키는 사람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만큼 그 은혜의 진로를 제한시키며 방해하고 있는 것이기때문이다.
3. 세상이라는 말 속에 그리스도에게서 기대된 회복을 일반적으로 포함시키고 있다.
4. 하나님의 ㅇ느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얻은 입양으로 인하여 우리가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잃어버린 기업의 소유권을 다시 회복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나안 땅을 모형으로 삼아 천국 생활의 소망과 하나님의 충만하고 완전한 축복이 아브라함에게 계시되었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소유권이 그에게 약속되었다고 사도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옳다.
5. 경건한 자들은 천국생활을 금세에서 맛보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자주 그들이 곤경과 궁핍으로 말미암아 자주 눌림을 받는다손치더라도 그렇지만 하나님꼐서 그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창조해 주신 것들을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가지며, 세상 축복들을 은혜로우시며 너그러우신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영원한 삶의 보증과 시식으로써 받아 누리기 때문에, 그들이 궁핍하다 하여도 그들은 땅과 바다와 하늘을 그들의 것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6. 경건치 못한 자들은 세상의 재물을 독점하여도 차라리 도적질하여 가로챈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그 소유물을 탈취한 까닭이다. 궁핍한 가운데 있는 경건한 자들에게는, 그들이 비록 검소하게 살고 있기는 하여도, 다른 사람들에게 속한 것은 아무것도 도적질하지 않고, 대신 그들이 그들의 기업을 완전하게 소유학 ㅔ될 때ㅏ, 즉 모든 피조물이 그들의 영광에 이바지하게 되는 떄까지, 하늘에 계시는 그들의 아바 아버지의 손에서 그들의 합법적인 배당금을 받고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 커다란 위로가 되는 것이다.
14 - 15 "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1. 아무도 자기가 양자된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율법의 의로 말미암아 기업이 그의 것이 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단언할 정도로 완전을 기할 수 있는 자가 과연 누가 있는가? 그렇게 되면 그의 믿음은 무효가 될 것이다.
2. 인간들을 위한 구원이 율법 준수에 근거한다고 하면 무슨 일이 생기는가? 인간의 양심은 확신을 갖지 ㅁ소하여 끊임없는 불안으로 괴로와하다가 마침내는 절망에 빠지고 말 것이다.
3. 약속은 행위에 그 근거를 두는 한, 약속은 폐기된다고 바울은 말한다. 우리가 행위를 의지할 때에 믿음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린다는 것을 우리는 특별히 인식해야 한다.
4. 그러므로 믿음이란 복음에서 깨닫고 또 하나님의 면전에서 양심의 평화를 누리며 쉼을 얻게 해주는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다.
5. 율법은 보복 이외에 아무것도 산출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은혜를 가져다 줄 수 없다. 그것은 율법이 덕망 있고 순결한 사람에게 생명의 길을 제시해 주었을 것이나, 그것은 죄 많고 부패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의무를 감당해 낼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주지도 않고서 그 의무를 행하라고 명령하기 때문에, 그것은 죄책 가운데 있는 인간들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으로 끌고 간다.
6. 율법이 우리 모두에게 결과시켜 주는 것은 오직 정죄 뿐이라는 것을 바울이 의미한 것임에 분명하다 .
7. 여기서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은 아무도 예외가 될 수 없는 단순한 범과가 아니라, 그가 말하고 있는 범함 은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무엇이 불쾌하게 하는지를 배웠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규정된 한계를 의식저긍로 그리고 고의적으로 범하는 경우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본문의 범함 은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의를 어기는 고의적인 완악함을 뜻한다.
16 - 17 " 16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7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
1. 우리가 아는 대로, 사도는 요지부동의 확실성을 갖춘 믿음을 믿음으로 평가한다.
2. 율법에 속한 자: 단순히 유대민족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여기서 바울은 행위의 의를 고집하고서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율법의 종들이 아니고, 율법으로 양육받았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른느 자들이 된 유대인들을 가리켜 말하고 있다. 마치 바울선생 자신처럼 말이다.
3. 바울선생은 이방인들이 이 은혜에 참여하는 자들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기업을 양도해 준 바로 그 예언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의 씨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4. 열국의 아비로 택정된 아브라함으로 봐서 이 은혜가 그 당시에는 이스라엘에게만 한정되어 있었지만, 그것이 장차 확대될 것이라는 것이 예표되었던 것이다.
5.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이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조상" 이라는 특권이 주어진 것은 우리와 그의 육적인 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기 때문이다.
6.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을 때에 생식력과 정력이 왕성한 것이나 한 것처럼 그 씨를 약속받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생식능력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생각의 차원을 높여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어떻게 보면 출산할 수 없고 죽은 자나 다름 없지만, 그들이 아브라함과 교제를 나누게 된다고 할지라도 불합리할 것은 없다.
7. 여기서 우리는 이 일반소명의 유형과 모형을 볼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을 때 우리는 무 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성품을 소유한 것철머 보일지라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아무 선도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게 되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완전히 우리 자신에 대해서 죽는 것이다.
18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1. 우리가 우리의 소망이 실체를 눈에 보이는 것에서 구하려고, 우리의 이해를 보이는 것에 국한시키는 것보다 믿음에 더 해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2. 만일 우리의 믿음이 육신의 모든 감정들을 높이 위에서부터 내려다 볼 수 있도록 할 수 있도록 천상의 날개를 펴서 올라가지 ㅇ낳는다고 하면, 그 믿음은 세상의 진토 가운데 언제나 싶이 묻혀 있게 될 것이다.
3. 그러므로 이 구절의 뜻은 아브라함에게 아무것도 바랄만한 근거가 없었을 때에, 그런데도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고 믿었으며,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셨던 그 사실이, 아무리 사실 그 자체로서는 믿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일지라도, 바랄 만한 충분한 근거가 되었던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
19 "19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1. 우리의 믿음은 완전하지 못하다. 아무리 많이 우리의 머리가 꺠우침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많이 무지한 채로 남아 있으며 , 그리고 아무리 많이 우리의 가슴이 뜨거운 확신을 갖는다 해도, 많은 의심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2. 그러므로 신앙인은 계속적으로 육신의 악들인 무지와 회의와 더불어 싸우는 것이다. 이러한 갈등과 싸움에서 그들의 신앙은 흔히는 심하게 흔들리며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승리하기 마련이며, 그러기에 연약할 그 때에 가장 큰 힘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3.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될 때에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하고 묻는 것은 놀란 나머지 묻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경이의 감탄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곧 경이의 감탄에서 깨어나 하나님의 능력을 깊이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경건치 못한 자들은 성도의 물음을 조롱하며, 하나님의 사역들을 신화로 간주하여 거부해버린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어린 애를 낳을 수 있는가 해서 웃으며 물었을 때에 하나님의 책망을 받지 않았지만, 사라의 웃음과 질문은 책망받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비난했기 때문이다.
4. 따라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칭의와 이방인들의 칭의가 정확하게 동일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이 받은 부르심을 불합리한 것으로 반대하는 경우 그들은 그들 자신의 조상을 모욕하는 것이 된다. (152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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