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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江邊에 살리라 /- 讀書信仰

로마서 4장


4:1 - 3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1. 바울은 믿음의 의를 행위가 없는 죄인을 위한 도움과 피난의 처소(the place of help and refuge)로 생각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그 의를 믿음의 전가된 의(the imputed righteousness of faith)라고 일컫는 것은 바른 표현이다. 

2.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 약속되지 않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구원없이 또한 약속되지 않는다. 동시에 우리에게 의가 전가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은혜나 구원의 소망에로 우리가 부르심을 받지 못한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p 131) 

comment: 즉 칼빈은 구원의 서정에서, 효과적인 부르심을 칭의 다음에 놓고 있음을 분명히 볼 수 있다. 의의 전가가 없으면 구원의 소망에로의 부르심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3.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입양과 하나님의 부성애에 대한 믿음이다. 이 입양과 부성애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원한 구원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롭게 여기셨다고 하신다면, 그 의의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그가 신뢰한 데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그가 받기를 감시 소망한 데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즉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세가 사람들이 아브라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말하지 않고, 그가 하나님의 법정 앞에서 가졌던 신분에 대해 말한 것이다. (페이지 132)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의가 그에게 전달됨을 깨달았다. 

comment: 그러므로 의(义)의 의미를 정의하는 데는 약속과 믿음의 이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의를 얻게 되는 것은 다만 그 의가 복음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우링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로써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의를 얻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4. 바울은 의의 전가와 칭의를 동의어로 다루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사람들이 그 자체에 있어서 어떤 존재들인가 하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생각해 주시느냐에 있다는 점이다. 

4 -5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1. 일하는 자: 선행을 열심히 하는 사람, 즉 자기 자신의 행적을 내세워 자기 공로를 자랑하려는 사람을 뜻함. 

2. 마찬가지로 "일하지 아니하는 자" 란 그 자신의 행위의 공로에 의해서는 아무것도 상급으로 받을 자격이 없는 자를 가리킴.

3. 따라서 바울은 어떤 보상을 하나님께로부터 바라는 타산적인 생각을 신자들이 갖지 못하게 금하는 것 뿐이다. 

4. 우리가 살펴본 대로, 우리의 논제는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삶을 규제할 것인가? 하는 신앙윤리 생활에 관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구원의 이유에 관한 것이다

5.믿음이 의로 간주되는 것은, 우리에게서 그것이 어떤 공로를 들추어 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잡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는 우리가 믿음으로 당연히 받은 삯이 아니라,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인 것이다. 

6.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의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속죄 제물이 되시어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해주시는 것 말고 , 무엇이겠는가? 이를 제외하고 우리는 무엇을 믿는단 말인가? 

7. 믿음은 공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 주기 때문이다. 

8. 바울은 하나님이 의를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진술할 뿐 아니라, 우리의 불의를 정죄한다. 따라서 요약하면, 자기네들이 경건치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 사람들만이 믿음의 의에 이르게 될 수 있는 것이다. 

6 - 8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1. 바울의 경우, 의란 죄 사함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과, 결국은 이 죄 사함 역시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공의를 만족시킴으로써 죄 용서함을 받으라고 가르치는 자들을 물리쳐야 한다. 

2.  한 사람의 어떤 의로운 행위를 해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한 가지 행위로 말미암아 어떤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예컨대 레위기 18장 5절에서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는 약속의 말씀대로 , 모든 면에서의 완전무결한 순종이다. 그러면 비느하스의 경우, 그의 행위가 의롭다 여김을 받았다고 함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뿐만 아니라, 그의 행위까지도 좋게 봐주시는 까닭이다. 즉 문제의 초점은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받아들이시고 반응하시느냐? 에 달린 것이다. 

3. 이는 행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길로 행하며,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선언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을 충분하게 만족시킬 수 있을만큼 완전하게 아무도 이를 행할 수 없기 에 이러한 종류의 모든 축복들은 우리가 죄를 사함 받아 정결케 되고 씻음 받음으로 복을 받게 될 때까지는 무용하다. 

4. 그러므로 행위의 의는 믿음의 의의 결과이며, 행위에서 생기는 축복은 죄 사함에 있는 축복의 결과이다. (페이지 136)

5. 오직 이 믿음의 의가 모든 기능들을 성취하지 않는한, 행위의 의나, 행위에서 오는 축복에 대한 선언은 아무것도 효력을 발생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믿음의 의가 먼저 확립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과일이 나무에서 자라나 열매맺는 것처럼 믿음의 행위의 의가 믿음의 의에서 자라나 열매 맺는 것이다. 

9 - 10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는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1.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거저 용서하여 자신과 화목케 한 사람들만이 복이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로부터 그들의 행위가 판단을 받게 되는 모든 사람들은 화가 있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그들 자신이 잘 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에 의하여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원리가 진술되는 것이다. 그러나 죄 사함이 모든 행위에 선행하지 않는 한, 이것은 충분치 못하다. 이 행위들 중에서 첫째가 할례였다. 즉 죄 사함을 얻는 뒤의 첫째 행위는 할례였다. 이 할례로 말밍마아 유대백성이 하나님께 순종하기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점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었다. 

2. 따라서 할례는 율법의 의의 최초의 (initial) 행위로 고려되어 있다. 따라서 이는 율법의 의의 기초였다. 아브라함의 의가 죄 사함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만일 그가 이 의를 할례 받기 전에 얻을 것이라고 한다면, 죄 사함은 이전의 공로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고 하고 있다. 바울의 논증은 인과관계의 순서에서 취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원인이 결과에 언제나 선행하듯, 아브라함이 그가 할례받기 전에 의를 얻었기 때문이다. 

11 - 12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 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졋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1. 할례는 무 할례시에 이미 얻은 믿음의 의를 확인해 주는 성질이 있고, 그래서 그 의를 결코 손상시키거나 제거하지는 않는다. 

2.  성례들은 하나님의 약속들이 우리의 가슴에 새겨지고, 그리고 은혜에 대한 확실성이 확증되는 표징들이다. 비록 성례들은 그 자체만으로는 무익하지만,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은혜의 도구로 작정하셨고, 그리고 그의 성신의 은밀한 은혜로 말미암아 택함 받은 자들의 유익을 증진하는 데 그들이 방편으로 삼게 하셨다. 

3. 할례의 표에 의하여 이중 은혜가 나타난 바 되었다는 점이 특별히 진술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축복받은 씨르 ㄹ약속해 주셨는데, 이 씨에게서 온 세상을 위한 구원이 기대되도록 되어 있었다. "내가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창17:7 는 약속은 이것에 달려 있었다. 


4. 그러므로 값없는 하나님의 화목이 이 표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5. 이를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아직 나이가 어린 탓으로 할례하라는 명령을 수행할 수 없었던 어린 영아들의 할례를 하나님께서는 명하셨다. 모세는 영적 할례를 하나님의 능력의 사역으로 특별히 언급하였다. 이는 신명기 30장 6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주꼐서 네 마음을 할례하실 것이라"


6. 결론적으로, 오늘의 세례에 두 가지의 요소가 있듯이, 옛날의 할례에도 거듭남의 생활(newness of life) 와 죄 사함(forgiveness of sins)의 두 가지를 증거한 두 요소가 있었다. 


7. 할례는 믿음의 의를 인치는 것으로서, 믿는 우리에게 의가 전가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이 바울은 놀라운 솜씨를 발휘하여 그의 적수드이 제사할 가능성이 있었던 반론에 응수하고 있다. 즉 만일 할례의 바로 그 진리와 의의가 무할례시에 발견되도록 되어 있는 것이라고 하면,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 대해 크게 자만할 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8. 할례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치는 데만 유효하다는 것이 인정되었을 경우, 오늘날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세례가 존재하는 경우, 이제는 할례란 아무 필요가 없는 깓락에, 이미 해결되어버린 문제 즉 왜 이방인에게는 믿음의 의가 아브라함의 경우와 똑같은 방식으로 인쳐질 필요가 없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아무 이득이 없는 논쟁을 바울은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9. 오직 믿음만이 모든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할례와 믿음을 조심스럽게 구별짓고 있는 것이다. 


10.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이 세례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을 부인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브라함의 것과 똑같은 믿음에 의해서 의롭다 함을 받기 때문이다. 


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 믿음이 의롭다 함을 얻는 데 아무것도 율법에서 빌려오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그 믿음은 하나님의 긍휼과만 관련되어 잇다는 것을 우리는 이로부터 알 수 있다. 


2. 이로부터 결론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의 의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은혜는 유대인에게 못지 않게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진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만일 인간들의 구원이 하나님의 선하심에만 근거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방인들을 그 은혜에서 제외시키는 사람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만큼 그 은혜의 진로를 제한시키며 방해하고 있는 것이기때문이다. 


3. 세상이라는 말 속에 그리스도에게서 기대된 회복을 일반적으로 포함시키고 있다. 


4. 하나님의 ㅇ느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얻은 입양으로 인하여 우리가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잃어버린 기업의 소유권을 다시 회복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나안 땅을 모형으로 삼아 천국 생활의 소망과 하나님의 충만하고 완전한 축복이 아브라함에게 계시되었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소유권이 그에게 약속되었다고 사도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옳다.


5. 경건한 자들은 천국생활을 금세에서 맛보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자주 그들이 곤경과 궁핍으로 말미암아 자주 눌림을 받는다손치더라도 그렇지만 하나님꼐서 그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창조해 주신 것들을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가지며, 세상 축복들을 은혜로우시며 너그러우신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영원한 삶의 보증과 시식으로써 받아 누리기 때문에, 그들이 궁핍하다 하여도 그들은 땅과 바다와 하늘을 그들의 것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6. 경건치 못한 자들은 세상의 재물을 독점하여도 차라리 도적질하여 가로챈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그 소유물을 탈취한 까닭이다. 궁핍한 가운데 있는 경건한 자들에게는, 그들이 비록 검소하게 살고 있기는 하여도, 다른 사람들에게 속한 것은 아무것도 도적질하지 않고, 대신 그들이 그들의 기업을 완전하게 소유학 ㅔ될 때ㅏ, 즉 모든 피조물이 그들의 영광에 이바지하게 되는 떄까지, 하늘에 계시는 그들의 아바 아버지의 손에서 그들의 합법적인 배당금을 받고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 커다란 위로가 되는 것이다. 


14 - 15 "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1. 아무도 자기가 양자된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율법의 의로 말미암아 기업이 그의 것이 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단언할 정도로 완전을 기할 수 있는 자가 과연 누가 있는가? 그렇게 되면 그의 믿음은 무효가 될 것이다. 


2. 인간들을 위한 구원이 율법 준수에 근거한다고 하면 무슨 일이 생기는가? 인간의 양심은 확신을 갖지 ㅁ소하여 끊임없는 불안으로 괴로와하다가 마침내는 절망에 빠지고 말 것이다. 


3. 약속은 행위에 그 근거를 두는 한, 약속은 폐기된다고 바울은 말한다. 우리가 행위를 의지할 때에 믿음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린다는 것을 우리는 특별히 인식해야 한다. 


4. 그러므로 믿음이란 복음에서 깨닫고 또 하나님의 면전에서 양심의 평화를 누리며 쉼을 얻게 해주는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다. 


5. 율법은 보복 이외에 아무것도 산출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은혜를 가져다 줄 수 없다. 그것은 율법이 덕망 있고 순결한 사람에게 생명의 길을 제시해 주었을 것이나, 그것은 죄 많고 부패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의무를 감당해 낼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주지도 않고서 그 의무를 행하라고 명령하기 때문에, 그것은 죄책 가운데 있는 인간들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으로 끌고 간다. 


6. 율법이 우리 모두에게 결과시켜 주는 것은 오직 정죄 뿐이라는 것을 바울이 의미한 것임에 분명하다 .


7. 여기서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은 아무도 예외가 될 수 없는 단순한 범과가 아니라, 그가 말하고 있는 범함 은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무엇이 불쾌하게 하는지를 배웠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규정된 한계를 의식저긍로 그리고 고의적으로 범하는 경우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본문의 범함 은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의를 어기는 고의적인 완악함을 뜻한다. 


16 - 17 " 16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7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


1. 우리가 아는 대로, 사도는 요지부동의 확실성을 갖춘 믿음을 믿음으로 평가한다. 


2. 율법에 속한 자: 단순히 유대민족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여기서 바울은 행위의 의를 고집하고서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율법의 종들이 아니고, 율법으로 양육받았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른느 자들이 된 유대인들을 가리켜 말하고 있다. 마치 바울선생 자신처럼 말이다. 


3. 바울선생은 이방인들이 이 은혜에 참여하는 자들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기업을 양도해 준 바로 그 예언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의 씨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4. 열국의 아비로 택정된 아브라함으로 봐서 이 은혜가 그 당시에는 이스라엘에게만 한정되어 있었지만, 그것이 장차 확대될 것이라는 것이 예표되었던 것이다. 


5.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이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조상" 이라는 특권이 주어진 것은 우리와 그의 육적인 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기 때문이다. 


6.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을 때에 생식력과 정력이 왕성한 것이나 한 것처럼 그 씨를 약속받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생식능력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생각의 차원을 높여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어떻게 보면 출산할 수 없고 죽은 자나 다름 없지만, 그들이 아브라함과 교제를 나누게 된다고 할지라도 불합리할 것은 없다. 


7. 여기서 우리는 이 일반소명의 유형과 모형을 볼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을 때 우리는 무 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성품을 소유한 것철머 보일지라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아무 선도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게 되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완전히 우리 자신에 대해서 죽는 것이다. 


18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1. 우리가 우리의 소망이 실체를 눈에 보이는 것에서 구하려고, 우리의 이해를 보이는 것에 국한시키는 것보다 믿음에 더 해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2. 만일 우리의 믿음이 육신의 모든 감정들을 높이 위에서부터 내려다 볼 수 있도록 할 수 있도록 천상의 날개를 펴서 올라가지 ㅇ낳는다고 하면, 그 믿음은 세상의 진토 가운데 언제나 싶이 묻혀 있게 될 것이다. 


3. 그러므로 이 구절의 뜻은 아브라함에게 아무것도 바랄만한 근거가 없었을 때에, 그런데도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고 믿었으며,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셨던 그 사실이, 아무리 사실 그 자체로서는 믿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일지라도, 바랄 만한 충분한 근거가 되었던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


19 "19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1. 우리의 믿음은 완전하지 못하다. 아무리 많이 우리의 머리가 꺠우침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많이 무지한 채로 남아 있으며 , 그리고 아무리 많이 우리의 가슴이 뜨거운 확신을 갖는다 해도, 많은 의심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2. 그러므로 신앙인은 계속적으로 육신의 악들인 무지와 회의와 더불어 싸우는 것이다. 이러한 갈등과 싸움에서 그들의 신앙은 흔히는 심하게 흔들리며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승리하기 마련이며, 그러기에 연약할 그 때에 가장 큰 힘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3.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될 때에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하고 묻는 것은 놀란 나머지 묻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경이의 감탄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곧 경이의 감탄에서 깨어나 하나님의 능력을 깊이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경건치 못한 자들은 성도의 물음을 조롱하며, 하나님의 사역들을 신화로 간주하여 거부해버린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어린 애를 낳을 수 있는가 해서 웃으며 물었을 때에 하나님의 책망을 받지 않았지만, 사라의 웃음과 질문은 책망받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비난했기 때문이다. 


4. 따라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칭의와 이방인들의 칭의가 정확하게 동일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이 받은 부르심을 불합리한 것으로 반대하는 경우 그들은 그들 자신의 조상을 모욕하는 것이 된다. (152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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