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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江邊에 살리라 /- 默想

욥기 6장

엘리바스의 책망에 대한 욥의 대화가 담겨져 있다. 엘리바스는 기본적으로 욥의 현재의 상황을 하나님께 징계를 받고 있는 것이라고 보고 있으며 이 징계를 잘 이겨내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리라는 입장이다. 

그러면 엘리바스의 책망? 권면? 에 욥이 어떻게 대답하는가? 생각해보자. 


1절 ~ 13절 

욥은 먼저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였던 자기의 말을 듣고 하는 친구들의 반응을 보고 친구들의 그 책망을 위한 자신의 변호를 하고 있다. 

1절 - 3절 에서 보면, "욥이 대답하여 가로도 나의 분함(anguish-고통)를 달아보며 나의 모든 재앙(misery-> 고통, 분함)을 저울에 둘 수 있다면 바다 모래보다 무거울 것이라 그럼으로 하여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

욥은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의 현실 속에서 체험하고 있는 극심한 불안과 고통의 심정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엘리바스의 대답에 이 부분을 제일 먼저 이야기 하는 욥의 대답은 의미 심장하다. 욥은 엘리바스에 대답에서 자기 자신의 극심한 불안에 대한 이해가 분명히 부족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때문에 3절 마지막 부분에서 "그럼으로 하여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라고 끝마친다. 그에게는 지금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자세히 캐어서 알기 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그 믿음으로 고통을 잘 인내해 가려고 하는 상황인데, 엘리바스의 대답을 듣고 엘리바스가 욥의 말을 오해하였다고 생각한 거 같다. 

4절 :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전능자의 화살이라 함은, 먼저 전능자는 하나님을 가리킴이 분명하고 화살은 말 그대로 멀리서 활을 쏘아서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는 작용을 한다. 그런데 욥은 자기 자신의 영이 그 독을 마셨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화살은 분명히 독이 있는 화살이라 볼 수 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두려움(Terrors)이 욥을 엄습하여서 치고 있다고 한다. 

욥의 입장에서는 하루에 엄청난 일을 겪었으나, 그 입으로는 적신으로 왔으니 주시는 분도 가져가시는 분도 하나님이니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리로다 하고 고백하였으나, 전능자의 화살이라 표현함은 가져가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말과 연결시키면 이해하기 쉬울 거 같다. 욥의 입장에서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전능자의 가져가심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갑자기 임하였기에, 화살이라고 표현한 거 같다. 화살의 특징은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예측불가능성에 있다. 욥은 바로 이런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화살은 독이 있어서 온 몸에 퍼지고 있는데, 그 결과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으로 욥은 가득차 있다. 왜냐하면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고 가져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5절 : "들 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6절 :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욥은 자기 자신의 불평의 정당성(?)을 이야기 하고 있다. 자기 자신의 현실 속에서 고통스러움을 부인하지 않으려고 한다. 들 나귀, 소, 소금 , 닭의 흰 자위 등을 들어서 자기의 현실을 지금 친구들한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들 나귀가 풀이 있으면 그 배고픔을 호소하기 위하여 우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며, 소가 꼴이 없으면 우는 것도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음식이 싱거우면 소금을 추가해서 먹는 것이 인지상정이며 닭의 흰 자위가 노른 자위보다 맛 없는 것도 인지상정이다. 욥은 여기서도 자기의 현실에서의 고통이 극심함으로 자신이 울고 있으며 이는 고통을 받는 인간이라면 다 그리 할 수 있는 인지상정이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여태까지 주의 은혜로 이 모든 은혜를 받아 왔다고 생각하였다. 

7절 : "이런 것을 만지기도 내 마음이 싫어하나니 못된 식물 같이 여김이니라 "

NIV : " I refuse to touch it; such food makes me ill" 

그러나 욥은 자기 자신이 이런 꼴을 위하여 살아온 것이 아니며, 이런 먹을 것과 입을 것이 그에게 쾌락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병들게 한다는 마음으로 살았다고 대답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녹녹치 않다. 이런 고통 중에 있는 주님께서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면 도무지 헤어나갈 길이 없음으로 그는 주께 길을 열어주기를 구하며 그 길이 하나님께서 데려가기는 것까지 은혜 베푸시기를 구하고 있다. 

8절: "하나님의 나의 구하는 것을 얻게 하시며 나의 사모하는 것 주시기를 내가 원하나니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그 손을 들어 나를 끊으실 것이라"

10절: " 그러할찌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무정한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할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욥은 주님이 데려가시기를 구하기까지 구하면서도 오히려 위로가 있고 무정한 고통 중에서도 기뻐한다고 하는 데 이는 욥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욥은 주의 긍휼을 믿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거역(deny)에는 소망이 담겨져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그 고통중에서도 오히려 위로와 기쁨이 있다고 한다. 

11-13 " 내가 무슨 기력이 있관대 기다리겠느냐 내 마지막이 어떠하겠관대 오히려 참겠느냐 나의 기력이 어찌 돌의 기력이겠느냐 나의 살이 어찌 놋쇠겠느냐 나의 도움이 내 속에 없지 아니하냐 나의 지혜가 내게서 쫓겨나지 아니하였느냐 "

욥은 지금 주님께서 긍휼을 내려 주셔서 자기 자신을 데려가 주시기를 구하고 있다. 이 참담한 현실 속에서 주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이 욥이 받고 있는 고통에 대한 공감,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욥의 소망, 사람으로 이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가끔씩 이유도 모르게 불가불 당하는 어려움들 이러한 것들에게서 욥은 구해주시기를 주께서 주시는 소망을 좇아서 구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 그 마지막을 알 수 없고, 이제 더이상 참을 힘도, 기력도, 도움도, 지혜도 자기 속에 있지 않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엘리바스의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인내하고 그 징계를 받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는 그 말에 대답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제 욥은 그 친구들을 책망하고 있다. 

14절 - 20절 : "피곤한 자 곧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를 그 벗이 불쌍히 여길 것이어늘 나의 형제는 내게 성실치 아니함이 시냇물의 마름같고 개울의 잦음 같구나 얼음이 녹으면 물이 검어지며 눈이 그 속에 감취었을 찌라도따뜻하면 마르고 더우면 그 자리에서 아주 없어지나니 떼를 지은 객들이 시냇가로 다니다가 돌이켜 광야로 가서 죽고 데마의 떼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스바의 행인들도 그것을 사모하다가 거기 와서는 바라던 것들을 부끄리고 낙심하느니라"

아 ~  ... 욥의 친구들에 대한 실망이 얼마나 큰지 그의 책망에서 볼 수 있다. 피곤한 자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욥은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는 것을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라고 표현한 거 같다. ) 를 그 벗이 불쌍히 여길 것이 맞다고 한다. 그런데 그 형제는 내게 성실치 아니하다고 한다. 성실함은 무엇인가? 지금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욥은 아주 중요한 말을 한다. 욥은 이 성실치 아니함을 시냇물의 마름과 개울의 잦음에 비유하고 있다. 시냇물은 다른 사람에게 희망과 생기를 상징하나 시냇물이 말랐다는 것은 황폐함을 의미한다. 시내물이 넘쳐흐르고 개울이 넘칠 때에는 객들이 떼를 지어서 시냇가로 다니다가 돌이켜 광야로 가고 데마의 떼들이 시냇물을 바라보고 , 스바의 행인들도 시냇물을 사모하다가 거기 와서는 시냇물의 마른 것을 보고 부끄리고 낙심한다고 한다. (스바의 행인, 데마의 떼와 시냇물 및 개울의 잦음의 관계를 주의 하라)

21절 - "너희도 허망한 자라 너희가 두려운 일을 본즉 겁내는구나 내가 언제 너희에게 나를 공급하라 하더냐 언제 나를 위하여 너희 재물로 예물을 달라더냐 내가 언제 말하기를 대적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포악한 자의 손에서 나를 구속하라 하더냐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꺠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옳은 말은 어찌 그리 유력한지 , 그렇지만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뇨 너희가 말을 책망하려느냐 소망이 끊어진 자의 말은 바람 같으니라 너희는 고아를 제비 뽑으며 너희 벗을 매매할 자로구나"

욥은 그 친구들을 위의 스바의 행인과 데마의 떼들과 같이 허망한 자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시냇물의 마름을 보고 두려워서 하여서 욥을 쉽게 판단하고 그리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욥은 그들에게 그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면 용납하겠으나, 근거없는 책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비유를 고아를 제비 뽑으며(이는 종으로 삼기 위해서 , 벗을 매매하는 자(벗을 팔아서 이득을 남기기 위해서를 가리키는 이 양 자사이에는 공동으로 부족한 점은 바로 형제에 대한 사랑과 긍휼인 것이다. )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28 - "이제 너희가 나를 향하여 보기를 원하노라 내가 너희를 대면하여 결코 거짓말 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돌이켜 불의한 것이 없게 하기를 원하노라 너희는 돌이키라 내 일이 의로우니라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내 미각이 어찌 궤휼을 분변치 못하랴"

마지막으로 욥은 친구들에게 돌이키라고 한다. 자기 자신의 일이 의로우며 그 혀에 불의가 없다고 한다. 친구들은 욥과 대화를 하려고 하고 그의 어려운 사정을 긍휼과 자비와 사랑을 드러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판단하려고 하였기에 책망을 하는 것이 되었다. 


생각할 점 : 마지막 절에 이제 너희가 나를 향하여 보기를 원하노라 하고 욥은 친구들에게 말한다. "나를 향하여 보기를 원한다" 그리하면 그들을 대면하여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아니하리라고 한다. 이는 무슨 말일까? 욥이 현실적인 고통을 이야기 하는 것이 거짓말, 즉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자가 그런 자신의 출생을 저주하는 것이 거짓말이라고 친구들이 판단한 거 같다. 

정말 그렇다면, 욥은 이를 분변할 수 있다고 하며 그들을 보고 너희는 돌이키라 , 내 일이 의로우니라 하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욥이 어찌 이렇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욥이 날마다 주와의 깊은 교통 속에 있지 않았는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깊은 사랑이 많기에 그 사랑을 기준으로 친구들에게도 그런 형제의 사랑을 원한 거 같다. 그러나, 욥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 일이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고, 왜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도 모르게 되는 상황에서 욥은 형제의 사랑을 원했다. 그러나 친구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욥에 대한 판단뿐이었다. 이를 욥이 분변한 것이다. 그리고 그 형제들을 보고 돌이키라고 하였다. 

그러면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욥의 친구 엘리바스보다 더 하지 않는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형제에 대해서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 조차도 없다. 긍휼, 자비, 사랑은 더욱 더 없다. 

그냥 시냇물을 찾아오는 떼를 지은 객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이들은 데마의 떼와 스바의 행인들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욥에 대한 자비와 긍휼과 사랑이 없었던 것이다. 

이것을 욥이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 

이것이 강변교회의 문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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