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5장에서는 욥의 친구 중에서 제일 처음 욥의 푸념? 불평에 대하여 대답하는 엘리바스이다. 엘리바스는 욥의 불평을 듣고 이 모든 재난이 모두 욥의 죄 때문에 징계를 받는 것이라고 판단한다. 욥이 하루 아침에 인생이 일생에도 겪지 못할 일들, 혹은 기나긴 일생 동안에 겪을 수 있는 일들을 한 번에 겪은 데 대해서 자기의 태어남을 저주하는 것을 보고 엘리바스는 아주 냉정하게 신학적으로 욥의 불평에 다가간다.
5장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1절부터 7절까지는 엘리바스가 욥이 겪고 있는 고난을 일반화함으로써 그 주장을 전개해 나가는 부분이며 8절부터 16절까지는 그 고난에서 의지할 하나님에 대한 엘리바스의 논증이고 마지막 부분인 17절부터 27절까지는 본격적으로 이러한 고난이 욥의 범죄로부터 온 것임으로 지금 현재 하나님께로부터 징계를 받고 있다는 논증을 펼치는 부분이다.
1절 "부르짖어 보아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 거룩한 자 중에 네가 누구에게로 향하겠느냐?"
엘리바스는 이미 욥을 범죄자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아직은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말하고 있지는 않다. 이 엄청난 재난이 큰 죄를 범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임할 수 없기 때문에 욥이 거룩한 자에게 부르짖어 보아도 응답할 자가 없다고 한다. 여기 거룩한 자라고 하는 것은 아마 이스라엘의 장로들, 욥과 동조해서 이스라엘의 연약함을 도왔던 자들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들에게 부르짖어 보아도 응답할 자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욥과 같이 이렇게 큰 징계를 받은 사람이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중에 그 뉘에게로 갈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엘리바스의 말은 신명기나, 레위기의 율법에서 범죄한 자를 대하는 주의 율법을 참조할 수 있다.
2절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엘리바스는 이 욥의 죄를 구체적으로 분노와 시기라고 생각하는 거 같다. 이 욥의 분노와 시기 때문에 욥은 미련한 자와 어리석은 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욥이 자신의 출생을 저주할 만큼 불평을 하였으며 여기서 엘리바스는 욥이 분노하고 시기한다고 판단한 거 같다.
3절 "내가 미련한 자의 뿌리 박는 것을 보고 그 집을 당장에 저주하였느니라"
엘리바스는 이를 또한 미련하다고 생각하여서 이는 저주받을 일이라고 한다. 분노와 시기를 하는 자는 미련한 자이며 그러면 이러한 분노와 시기를 터로 세워진 집은 저주를 받을 집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4절 " 그 자식들은 평안한 데서 멀리 떠나고 성문에서 눌리나 구하는 자가 없으며
엘리바스의 논리는 기존의 논조에서 한 걸음 더 발전하여서 이런 분노와 시기 위에 집을 세움으로 저주를 받은 집의 자식들이 그 평안에서 떠나거 성문에서 눌리나 구하는 자가 없다고 한다. 즉 그 자식들도 평안을 잃을 것이며 다른 사람들의 긍휼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 4절의 말씀은 3절의 엘리바스의 말씀에서 그 미련한 자의 뿌리 박는 것을 보고 그 집을 저주하는 것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는 데 지금 엘리바스는 그 집의 자식들을 저주하고 있다.
5절 "그 추수한 것은 주린 자가 먹되 가시나무 가운데 있는 것도 빼앗으며 올무가 그의 재산을 향하여 입을 벌리느니라"
엘리바스의 욥의 가문에 대한 저주는 계속 발전하여 주님이 주신 소산. 가업 ( 자식과 재산 ) 중 재산을 저주하는 것을 본다. 범죄한 자가 그 추수한 것은 추수할 길이 없으니깐 길 가는 다른 주린 자가 먹고 또 가시 나무 가운데 있는 것도 빼앗긴다고 한다. 통상적으로 가시나무에 있는 것은 열매가 잘 열리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열매를 따 먹으려면 가시나무의 가시에 찔림을 극복해야 먹을 수 있는 데 이러한 가시 나무의 열매도 빼앗길 것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엘리바스는 올무가 그 재산을 향하여 입을 벌린다는 것이다.
구약 특히 잠언서에 보면 올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자는 올무에 빠지느니라" . 올무는 통상적으로 밭갈이 하는 소의 목에 걸어서 소가 밭을 가는 동안 다른 일을 못하도록 꼭 붙들어두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무를 쓰고 있는 소는 옴짝달싹 못하고 그 주인의 행하고자 하는 대로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잠언서의 이 말씀을 이 기초위에서 생각해보자면 사람을 두려워하는 자는 소가 쓰고 있는 이런 올무에 빠지고 있는데,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올무처럼 그를 꼭 조여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자신의 의지가 족쇠처럼 구속되어 다른 사람의 의지대로 행하게 된다는 뜻이다. 즉 의지적으로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어 버린다는 말이다.
본문에서 엘리바스는 "올무가 그의 재산을 향하여 입을 벌리느니라" 하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결국 주께서 주신 그 재산이 복일진대, 올무가 그 재산을 삼키려 하여서 그 재산조차도 올무의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 재산이 올무가 되어서 더욱 더 나락에 떨어져 나갈 것이라고 보고 있다.
6절 "재앙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요 고난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엘리바스는 여기서 그의 논쟁의 1차적인 결론을 제시한다. 즉 욥이 겪고 있는 재앙은 그냥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요 , 겪고 있는 고난이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티끌과 흙은 다 같은 말이다. 티끌은 그야말로 너무나도 작은 존재로서 그 존재의 가치가 있는 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미미한 것이다. 흙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흙 자체만으로는 통상적으로 사람에게 주는 이익이 많은 것이라고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엘리바스의 말은 미미한 데서 이러한 재앙과 고난이 일어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즉 욥의 재앙과 고난은 그 원인이 있는데 그것이 죄라는 자신의 논증을 진일보 확대시킨다.
7절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엘리바스는 7절에서 욥을 향한 어조가 갑자기 변하여서 일반화시키는 경향이 나타난다. 즉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다 라는 표현으로 인생이 모두 죄인으로 태어났는데, 죄인이면 고난을 겪게 될 것임으로 그 뜻은 불티가 위로 날음 같다는 것이다. 이는 자기 자신의 논쟁을 일반화 함으로써, 진리의 일반화적인 특성을 빌어서 자기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7절은 앞의 1절부터 6절까지의 엘리바스의 논조의 근거이다. 엘리바스는 여기까지도 욥의 죄를 직접 연결시키지 않고 다만 고난은 죄에서 나오는 데, 그 고난의 특성을 말하고 고난의 보편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8절: " 나 같으면 하나님께 구하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엘리바스는 여기서 하나님을 욥에게 제시한다. 이 말의 내면에는 욥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고 의탁하지 않고 있으면서 불평 불만만 하고 있다는 내재적인 의미가 포함되고 있다. 결국 모든 인생이 고난을 겪을 진대 고난을 겪으면 하나님께 의탁해야 하는 것이지 여기서 불평을 부리는 것이 맞느냐? 하는 것이 엘리바스의 주장인 것이다.
9절 : "하나님은 크고 측량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10절 : "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시며 "
11절: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슬퍼하는 자를 흥기시켜 안전한 곳에 있게 하시느니라"
12절: "하나님은 궤휼한 자의 계교를 파하사 그 손으로 하는 일을 이루지 못하게 하시며 "
13절: "간교한 자로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며 사특한 자의 계교를 패하게 하시므로"
14절:" 그들은 낮에도 캄캄함을 만나고 대낮에도 더듬기를 밤과 같이 하느니라"
15절: "하나님은 곤비한 자를 그들의 입의 칼에서 강한 자의 손에서 면하게 하시나니"
16절:" 그러므로 가난한 자가 소망이 있고 불의가 스스로 입을 막느니라"
9절부터 16절까지는 엘리바스는 8절의 하나님께 구하며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라는 권면의 말을 입증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논증하는 부분이다.
인생의 이런 고난을 겪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인생에게 기이한 일과 측량할 수 없는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며 또한 비도 내리시고 물도 내리시며 곤비한 자를 일으키시고 가난한 자 즉 고난을 겪고 있는 자의 소망이 된다고 권면한다.
17절:" 볼찌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찌니라"
여기에서부터 엘리바스의 논증의 화살이 본격적으로 욥에게로 향한다. 9절부터 16절까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위대하심을 노래하는데, 17절에서는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으니 하나님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라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즉 욥이 하나님께 지로르 지어서 지금 받고 있는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징계를 받는 다고 생각하며 이런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18절: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19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20절: "기근 때에 죽음에서 , 전쟁 때에 칼 권세에서 너를 구속하실 터인즉
21절: " 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 멸망이 올떄에도 두려워 아니할 것이라
22절: "네가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 아니할 것은
23절: "밭에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친할 것임이라
24절: " 네가 네 장막의 평안함을 알고 네 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을 것이며
25절: "네 자손이 많아지며 네 후예가 땅에 풀 같을 줄을 네가 알것이라
26절: "네가 장수하다가 무덤에 이르리나 곡식단이 그 기한에 운반되어 올리움 같으리라
27절: "볼쨰어다 우리의 연구한 바가 이같으니 너는 듣고 네게 유익된 줄 알찌니라
18절에서 마지막 27절까지 엘리바스는 17절에서 언급한 욥이 죄를 짓고 있는 것 때문에 하나님꼐 징계를 받는데, 하나님의 그 경책을 업신여기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이라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그러니 이 죄로 인한 징계를 잘 견디고 그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생각할 점 :
1. 앞 부분에서 욥은 분명히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이고, 또한 사탄이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까닭없이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욥이 하는 그 일에 복을 베풀어 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욥을 시험해보겠다는 것을 하나님께 허락 받았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마귀를 사용할지라도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경우도 있다는 말이다. 사단의 말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심으로 인하여 경외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손의 행함에 복을 주심으로 인함인지 자아성찰이 필요하다. 특히 우리 교회의 현실에서 그렇다. 우리의 믿음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를 시험하는 데에서 떨어지면 하나님의 이름이 실추되는 것이며 결국은 신자가, 교회가 죄를 짓고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2. 내 모든 삶에서 어려움들이 내 자신의 죄로부터 인함이라는 것인지? 아니면 보편적으로 타락한 인간사회에서 살고 있는 한 분자로서 당하고 있는 어려움인지의 구별할 수 있는 구별점이 어디에 있는가? 율법?
3. 우리 교회의 현실은 주님께서 욥을 시험하셨던 것처럼 시험하는 것뿐인가? 아니면 우리 교회의 현실의 죄의 경책도 포함되는가? 만일 둘 다 포함된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임해야 하는가?
결론:
1. 형제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섣불리 죄라고 판단을 하여서 현재 징계를 받고 있다고 판단을 하면 안된다. 형제가 불평 불만을 토로하더라도 말이다.
2. 우리 주님은 "네 형제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다. 엘리바스의 권면에서 형제 사랑이 드러나는가? 신학적인 , 존재론적인 지식의 나열로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닌지?